[매일경제] '파이어의 꿈' 잠시 접고…난 오늘도 '원화채굴' 간다

  •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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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회사원 / 직장인 A to Z ◆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설명[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신이시여, 딱 원금만 회복시켜주시면 다시는 코인판(주식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요즘 많은 재테크족이 하루를 열면서 올리는 기도다. 연초만 해도 미약하나마 붉은색을 보여주던 투자 계좌 수익률은 몇 달 후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반 토막이 났다. 가상화폐(코인) 디파이(De-Fi)나 미국 기술주를 집중적으로 담았던 투자자들은 '-70%'도 흔하다. 특히 '숫자 좀 알고 재테크 좀 해봤다'는 금융권 직장인들의 타격이 크다. 일론 머스크의 도지코인으로 30대 파이어(FIRE)족을 꿈꿨던 박 대리, 테슬라로 인생 역전을 노렸던 김 대리 모두 '현생(차가운 현실)'으로 돌아온 지 오래다.

당장 수익률로 체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일 오르는 금리에 '영끌'로 집을 매수한 부동산 올인족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금융사에 근무하는 30대 직장인 김 모씨는 "이제 남은 것은 '원화채굴'뿐"이라고 말했다. 원화채굴이란 월급이나 다른 소득으로 종잣돈을 모으는 것을 말한다. 가상화폐 투자자들이 코인을 채굴하는 것에 빗대 만들어진 말인데, 시장이 안 좋을 때 '일하러 가자'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오늘도 출근길에 스마트폰으로 시세를 확인하고, 한숨을 쉬면서 일터로 향하는 금융사 직원들의 속내를 들어봤다. 대부분 '폭망기'다.

◆ '서학왕개미' 꿈꿨던 A과장



금융사에 근무하는 30대 과장 A씨는 지난해 자산의 상당 부분을 미국 주식에 투자했다. '꾸자사모'(꾸준히 자산을 사서 모으자) 정신으로 서학개미를 넘어 서학왕개미를 꿈꾼 적도 있었지만, 요즘은 좌불안석이다. 그는 "나는 남들보다는 경제를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미국 경제가 성장을 지속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짧은 시간에 계좌가 반 토막이 나다 보니 평정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한동안 하락장이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해 말 1만6000선을 넘었던 나스닥지수는 현재 20% 이상 하락해 약세장에 진입했다. A씨 계좌도 파란불투성이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개별 종목보다 분산 투자해주는 상장지수펀드(ETF) 위주로 투자했지만, 역시 시장이 안 좋을 땐 무용지물이었다. 특히 나스닥을 3배로 추종하는 레버리지 상품 TQQQ도 포함돼 있다 보니 손실폭은 더 크다. A씨는 "작년 주식시장이 호황일 땐 자신감이 넘쳤다. 상사가 조금만 못살게 굴면 그만두고 전업투자에 나설까도 생각했다"면서 "이제 다 옛날이야기다. 다시 겸손한 자세로 회사에 다녀야 할 것 같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 월급을 모으면서 투자도 계속할 생각이다. 미국 금리 인상, 인플레이션 등으로 잠시 증시가 휘청이는 것일 뿐 장기적으로는 우상향한다는 믿음에서다. 그는 "몇 년을 기다리면 미국 경제는 성장하게 돼 있다"며 "진정으로 'FIRE'할 그날까지 투자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디파이교' 믿었던 B대리


4대 코인거래소 중 한 곳에서 일하는 B대리는 최근 우울증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남들보다 일찍 가상화폐 투자를 접했고, 공부도 웬만한 투자자만큼 열심히 했다. 일하면서 코인 이야기를 많이 듣고 공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B대리는 열심히 공부한 지식을 토대로 지난해 말 담대한 계획을 세웠다. 탈중앙화금융(디파이)을 통해서 높은 이자 수익을 거두는 완벽한 재테크 청사진이었다. 그에게 디파이 포트폴리오는 구원을 약속하는 신흥종교와도 같았다. 실제로 청사진은 첫 몇 주 간은 실현되는 듯했다. 코인 가격 상승에 이자 수익까지 더해지면서 잔액은 급속도로 불어났다. 자고 나면 자산이 늘어나 있는 '돈복사'의 시절이었다. 단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계좌가 완전히 박살이 나기까지는 두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코인 가격이 급락하면서 디파이에 예치해 놓은 상품들이 덩달아 청산됐다.

B대리는 "몇 달 전만 해도 남들은 모르는 재테크 비법을 나만 알고 쉽게 돈을 버는 느낌이었는데 이젠 디파이고 뭐고 다 모르겠다. 다시 상승장이 올 때까지 회사에 처박혀 원화채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하와이 항공권 알아보던 C주임


작년 하반기 같은 금융권에 근무하는 친구의 권유로 '위믹스 코인'에 투자했던 C주임은 불과 두 달여 만에 예닐곱 배의 상승을 경험했다. 그는 "하루에도 30~40% 오르는 등 주식과 비교가 안 되는 코인의 상승을 경험하면서 영앤드리치를 꿈꿨다. 파리와 뉴욕 일등석 항공권을 알아보고 호화 해외여행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다 꿈같은 이야기"라고 했다.

오르던 속도만큼 하락도 전광석화였다. 급격히 불어났던 계좌가 석 달 만에 원금 수준까지 하락하더니 다시 두 달여 만에 '반 토막'이 났다. 미처 손쓸 틈도 없는 폭락이었다. 한 번은 올라주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원하는 반등은 오지 않았다. C주임은 "친구가 작년 이맘때 도지코인으로 억대 수익을 내서 어린이날, 어버이날에 최고급 호텔에서 뷔페를 쏘고 아내에게 명품백을 사주고 난리였다"면서 "올해는 계좌가 반 토막이 난 터라 5월 가정의 달이 두렵다고 하더라. 술을 마시면서 아내와 아이 볼 면목이 없다며 우는데, 내가 미혼인 게 다행이다 싶었다"고 했다.

◆ 십만전자 신봉했던 D부장


D부장의 악몽은 2022년 새해 첫날부터 시작됐다. 우량주라고 생각해 투자했고, 10% 가까운 수익률을 올리고 있던 오스템임플란트의 거래정지 소식이 들린 것이다. D부장은 "업계를 선도하는 오스템임플란트 같은 업체에서 직원 한 명이 1000억원이 넘는 돈을 횡령할 수 있었다는 건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피 같은 돈 수천만 원이 들어 있는데, 상장폐지까지 거론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고 했다. 해당 종목의 거래정지는 4개월이 넘게 이어지다가 지난 4월 28일 재개됐지만 정지 당시 14만원이 넘던 주가는 현재 11만원대로 30% 가까이 주저앉았다. 전체 투자금의 20%를 오스템임플란트에 투자하던 D부장은 주식 잔액 창의 파란불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는 "오스템임플란트만 이러면 말도 안 한다. 십만전자(삼성전자 주가 10만원), 사천피(코스피 4000)를 외친 지 얼마나 됐다고, 모든 종목이 오스템임플란트만큼 빠졌다"며 우울해했다. 또 다른 금융사에 다니는 E차장은 국내 게임주 때문에 울고 있다. 평소 게임을 즐기던 그는 '펄어비스'에 거금을 투자하며 재미를 봤지만, 올 1월부터 시작된 게임주 폭락의 직격탄을 맞았다.

◆ 고생했던 예금족들은 표정관리

 

 작년 금융사에서 희망퇴직한 F씨는 요즘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다. 두둑한 퇴직금과 억대 위로금을 은행에 고이 모셔놓아 주변의 곡소리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F씨는 "강남은 아니지만 서울에 대출 없이 아파트도 있고, 퇴직금과 위로금도 저축은행 정기예금 등으로 굴리고 있는데 요금 금리가 올라서 재미를 보고 있다"며 웃었다. 그는 "최근 2~3년간 회사에서 '천연기념물' 취급을 받았다. 투자에 성공한 후배들이 예·적금만 고집하는 나를 은근히 무시하는 게 느껴져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제로금리 시대가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데다 곧 미국 긴축정책도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버텼는데 내 판단이 맞았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다.


F씨는 당분간 매우 안정적으로 은퇴자금을 관리할 예정이다. 2년 내 진짜 위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2년 이상 저축은행 10여 곳에 4800만원씩 나눠서 넣고 이자를 받는 생활을 이어가려고 한다. 지금 회사가 알선해 준 재취업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있는데, 작은 회사에라도 취직해 월급을 확보하고 진짜 위기가 왔을 때 은행 예금을 깨서 투자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금리가 오르면서 한 푼이라도 이자를 더 받기 위한 노력도 치열하다. 저축은행 직원 G씨는 최근 경쟁 저축은행의 고금리 예금에 가입했다. 또 다른 저축은행 직원 H씨는 저축은행중앙회 애플리케이션 SB톡톡플러스를 이용해 타사 예·적금 상품을 상시 점검한다. H씨는 올 들어서만 저축은행 3곳에 첫 계좌를 개설했다.

[명지예 기자 / 최근도 기자 / 서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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